@jeffreythomas369: #CapCut Allow me to reintroduce myself… My name is Jeff! A little introduction, a little attitude, and a whole lot of ambition. Built from experience, fueled by vision, and still nowhere near my peak. I’m not here to fit into a box. I’m here to leave my own mark. J… E… F… F… Jeffery Thomas. Now You Know. Original music and creative vision by Jeffery Thomas. #JefferyTh#JefferyThomaso#NowYouKnowM#OriginalMusicentArtist

Jeffery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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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06 November 2026 22:11:22 G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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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ssyrthanu
sassyrthanu :
2026-11-07 02: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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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oz
PB❤️‍🔥DarcccDoll🇨🇦 🍒💥🎸🌙 :
2026-11-06 22:5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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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죽었는데 상복 1년이냐 3년이냐? 조선 조정이 뒤집혔다! [통설 | 효종이 죽자 신하들이 상복 때문에 싸웠다!] 조선 제17대 왕 효종!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겠다며 북벌을 준비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왕의 계모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신하들이 대립했습니다. 1년을 입어야 한다! 아니다! 3년을 입어야 한다! 고작 상복 입는 기간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웠다고요? 실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반전 | 효종은 왕이었지만 장남은 아니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원래 왕위를 이어야 할 사람은 형 소현세자였습니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죽고 동생 효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이 되었으니 장자와 같은 대우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태어난 순서대로 둘째 아들로 보아야 할까요? 이 질문이 조선의 정치권력을 뒤흔든 예송논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몰랐던 사실 ① | 효종은 청나라에 끌려간 왕자였다!] 1636년 병자호란!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이듬해 삼전도에서 항복했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봉림대군이 바로 훗날의 효종입니다. 그는 약 8년 동안 청나라에 머물렀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북벌을 준비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몰랐던 사실 ② | 형이 죽자 동생이 왕세자가 됐다!]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손자가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선 제17대 왕 효종입니다. 왕위 계승이 일반적인 장자 계승과 달랐다는 사실은 훗날 예송논쟁의 중요한 배경이 됐습니다. [몰랐던 사실 ③ | 새어머니가 아들보다 다섯 살 어렸다!] 효종의 친어머니는 인열왕후였습니다. 하지만 인열왕후는 1635년에 사망했습니다. 인조는 1638년 장렬왕후 조씨를 새 왕비로 맞았습니다. 장렬왕후는 1624년생! 효종은 1619년생! 새어머니가 의붓아들보다 다섯 살 어렸습니다. 그녀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대비가 됐고, 자의대비라는 존호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 자의대비의 상복이 논쟁의 중심이었습니다. [몰랐던 사실 ④ | 왕이 죽었는데 3년상을 못 한다고?] 1659년 효종이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됐습니다. 당시 유교 예법에서는 장자와 다른 아들에 대한 부모의 상복 규정이 달랐습니다.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1년복이 적절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남인은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장자에 준해 대우해야 한다며 3년복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제1차 예송, 기해예송입니다. [몰랐던 사실 ⑤ | 송시열과 허목이 정면으로 맞섰다!] 서인의 대표 인물은 송시열과 송준길! 남인에서는 허목과 윤휴 등이 3년설을 주장했습니다. 서인 쪽은 효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더라도 인조의 맏아들은 아니라는 점을 중시했습니다. 남인 쪽은 왕위를 계승한 국왕의 종통을 강조했습니다. 영의정 정태화는 《경국대전》 등 국가의 복제 규정을 근거로 1년복을 제안했습니다. 결국 현종은 1년복을 채택했습니다. 서인에게 유리한 결과였습니다. 다만 최종 결정의 법적 근거와 송시열의 예학적 논리는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몰랐던 사실 ⑥ | 상복 논쟁이 유배 사건으로 번졌다!] 논쟁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남인 윤선도는 서인들의 주장이 효종의 왕통을 낮추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서인들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윤선도는 유배됐습니다. 남인의 정치적 입지는 약해졌고, 서인의 권력이 강화됐습니다. 상복의 길이를 둘러싼 의견 차이가 실제 정치적 처벌로 이어진 것입니다. [몰랐던 사실 ⑦ | 15년 뒤 며느리 상복으로 또 싸웠다!] 1674년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사망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됐습니다. 서인은 9개월을 주장했습니다. 남인은 1년을 주장했습니다. 왜 또 다툼이 벌어졌을까요? 인선왕후를 장자의 아내로 볼지, 둘째 아들의 아내로 볼지가 쟁점이었습니다. 제2차 예송, 갑인예송입니다. [몰랐던 사실 ⑧ | 이번에는 남인이 이겼다!] 1674년 현종은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1년으로 결정했습니다. 남인의 주장이 채택된 것입니다. 서인 주요 인물들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같은 해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했습니다. 숙종은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등용했습니다. 두 차례 예송논쟁의 결과는 서로 달랐습니다. 1659년 기해예송은 서인에게 유리했고, 1674년 갑인예송은 남인의 집권으로 이어졌습니다. [몰랐던 사실 ⑨ | 효종은 정말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을까?]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북벌을 준비했습니다. 송시열 등 대청 강경파를 등용하고 군사훈련과 무기 개량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는 이미 중국 대륙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군대를 키웠어도 실제 북벌을 감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북벌은 군사적 준비뿐 아니라 왕권과 정치질서를 강화하는 의미도 지녔습니다. [몰랐던 사실 ⑩ | 청나라를 치려던 군대가 청나라를 도왔다?] 1654년과 1658년, 조선군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출병했습니다. 상대는 러시아 세력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나선정벌입니다. 조선의 조총병은 청군과 함께 흑룡강 일대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청나라를 공격하려던 효종의 군대가 실제로는 청나라를 도와 싸운 셈입니다. 복잡했던 당시 국제정세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몰랐던 사실 ⑪ | 전쟁 뒤 백성은 세금 때문에 고통받았다!] 효종이 즉위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복구해야 했습니다. 토지가 황폐해지고 백성의 삶이 어려웠습니다. 특히 공물을 거두는 과정에서 방납의 폐단이 나타났습니다. 효종은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 확대를 추진했습니다. 1651년 충청도! 1658년 전라도 연해 지역! 대동법을 확대해 공납 부담을 개선하고 국가 재정을 정비하려 했습니다. [몰랐던 사실 ⑫ | 서양인 하멜도 효종 시대에 왔다!]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으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미 네덜란드 출신 박연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멜은 훗날 조선에서 탈출해 자신의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효종 시대는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면서도 바깥 세계와 예상치 못한 접촉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이유 | 왜 조선은 상복에 그렇게 민감했을까?]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중요한 원리로 삼았습니다. 상복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누구의 장자인지, 왕위 계승이 정당한지, 왕실의 질서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와 연결됐습니다. 예송논쟁은 복상 예법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논쟁이면서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기도 했습니다. [현생 아이디어 | 사소해 보이는 규칙에도 권력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도 규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권한과 책임이 달라집니다. 효종의 예송논쟁도 겉으로는 상복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왕실의 정통성과 정치질서를 둘러싼 논쟁이었습니다. 역사를 볼 때는 무엇을 두고 싸웠는지만큼 왜 그것이 중요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한능검 핵심 키워드] - 효종: 조선 제17대 왕, 재위 1649~1659년 - 소현세자: 인조의 장남, 효종의 형 - 봉림대군: 효종의 왕자 시절 봉호 - 1636년: 병자호란 - 1645년: 소현세자 사망 - 1649년: 효종 즉위 - 자의대비: 인조의 계비, 효종의 계모 - 북벌론: 효종의 대청 복수·군비 강화 구상 - 김육: 대동법 확대 추진 - 1651년: 충청도 대동법 시행 - 1654·1658년: 나선정벌 - 1659년 기해예송: 서인 1년설·남인 3년설, 1년복 채택 - 1674년 갑인예송: 서인 9개월설·남인 1년설, 1년복 채택 - 송시열·송준길: 서인의 대표 예론 인물 - 허목·윤휴: 남인의 대표 예론 인물 - 현종: 효종의 아들, 두 차례 예송 당시 국왕 - 숙종: 갑인예송 이후 남인 등용 [상식 퀴즈] 1659년 효종의 죽음으로 벌어진 제1차 예송논쟁에서 최종 채택된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은 얼마였을까요? ① 3개월 ② 9개월 ③ 1년 ④ 3년 정답: ③ 1년 [오늘의 한 줄] 효종은 왕이었지만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계모의 상복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충돌했습니다. 왕이 된 아들을 장자로 볼 것인가!
왕이 죽었는데 상복 1년이냐 3년이냐? 조선 조정이 뒤집혔다! [통설 | 효종이 죽자 신하들이 상복 때문에 싸웠다!] 조선 제17대 왕 효종!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겠다며 북벌을 준비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왕의 계모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신하들이 대립했습니다. 1년을 입어야 한다! 아니다! 3년을 입어야 한다! 고작 상복 입는 기간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웠다고요? 실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반전 | 효종은 왕이었지만 장남은 아니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원래 왕위를 이어야 할 사람은 형 소현세자였습니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죽고 동생 효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이 되었으니 장자와 같은 대우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태어난 순서대로 둘째 아들로 보아야 할까요? 이 질문이 조선의 정치권력을 뒤흔든 예송논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몰랐던 사실 ① | 효종은 청나라에 끌려간 왕자였다!] 1636년 병자호란!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이듬해 삼전도에서 항복했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봉림대군이 바로 훗날의 효종입니다. 그는 약 8년 동안 청나라에 머물렀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북벌을 준비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몰랐던 사실 ② | 형이 죽자 동생이 왕세자가 됐다!]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손자가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선 제17대 왕 효종입니다. 왕위 계승이 일반적인 장자 계승과 달랐다는 사실은 훗날 예송논쟁의 중요한 배경이 됐습니다. [몰랐던 사실 ③ | 새어머니가 아들보다 다섯 살 어렸다!] 효종의 친어머니는 인열왕후였습니다. 하지만 인열왕후는 1635년에 사망했습니다. 인조는 1638년 장렬왕후 조씨를 새 왕비로 맞았습니다. 장렬왕후는 1624년생! 효종은 1619년생! 새어머니가 의붓아들보다 다섯 살 어렸습니다. 그녀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대비가 됐고, 자의대비라는 존호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 자의대비의 상복이 논쟁의 중심이었습니다. [몰랐던 사실 ④ | 왕이 죽었는데 3년상을 못 한다고?] 1659년 효종이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됐습니다. 당시 유교 예법에서는 장자와 다른 아들에 대한 부모의 상복 규정이 달랐습니다.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1년복이 적절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남인은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장자에 준해 대우해야 한다며 3년복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제1차 예송, 기해예송입니다. [몰랐던 사실 ⑤ | 송시열과 허목이 정면으로 맞섰다!] 서인의 대표 인물은 송시열과 송준길! 남인에서는 허목과 윤휴 등이 3년설을 주장했습니다. 서인 쪽은 효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더라도 인조의 맏아들은 아니라는 점을 중시했습니다. 남인 쪽은 왕위를 계승한 국왕의 종통을 강조했습니다. 영의정 정태화는 《경국대전》 등 국가의 복제 규정을 근거로 1년복을 제안했습니다. 결국 현종은 1년복을 채택했습니다. 서인에게 유리한 결과였습니다. 다만 최종 결정의 법적 근거와 송시열의 예학적 논리는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몰랐던 사실 ⑥ | 상복 논쟁이 유배 사건으로 번졌다!] 논쟁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남인 윤선도는 서인들의 주장이 효종의 왕통을 낮추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서인들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윤선도는 유배됐습니다. 남인의 정치적 입지는 약해졌고, 서인의 권력이 강화됐습니다. 상복의 길이를 둘러싼 의견 차이가 실제 정치적 처벌로 이어진 것입니다. [몰랐던 사실 ⑦ | 15년 뒤 며느리 상복으로 또 싸웠다!] 1674년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사망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됐습니다. 서인은 9개월을 주장했습니다. 남인은 1년을 주장했습니다. 왜 또 다툼이 벌어졌을까요? 인선왕후를 장자의 아내로 볼지, 둘째 아들의 아내로 볼지가 쟁점이었습니다. 제2차 예송, 갑인예송입니다. [몰랐던 사실 ⑧ | 이번에는 남인이 이겼다!] 1674년 현종은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1년으로 결정했습니다. 남인의 주장이 채택된 것입니다. 서인 주요 인물들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같은 해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했습니다. 숙종은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등용했습니다. 두 차례 예송논쟁의 결과는 서로 달랐습니다. 1659년 기해예송은 서인에게 유리했고, 1674년 갑인예송은 남인의 집권으로 이어졌습니다. [몰랐던 사실 ⑨ | 효종은 정말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을까?]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북벌을 준비했습니다. 송시열 등 대청 강경파를 등용하고 군사훈련과 무기 개량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는 이미 중국 대륙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군대를 키웠어도 실제 북벌을 감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북벌은 군사적 준비뿐 아니라 왕권과 정치질서를 강화하는 의미도 지녔습니다. [몰랐던 사실 ⑩ | 청나라를 치려던 군대가 청나라를 도왔다?] 1654년과 1658년, 조선군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출병했습니다. 상대는 러시아 세력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나선정벌입니다. 조선의 조총병은 청군과 함께 흑룡강 일대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청나라를 공격하려던 효종의 군대가 실제로는 청나라를 도와 싸운 셈입니다. 복잡했던 당시 국제정세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몰랐던 사실 ⑪ | 전쟁 뒤 백성은 세금 때문에 고통받았다!] 효종이 즉위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복구해야 했습니다. 토지가 황폐해지고 백성의 삶이 어려웠습니다. 특히 공물을 거두는 과정에서 방납의 폐단이 나타났습니다. 효종은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 확대를 추진했습니다. 1651년 충청도! 1658년 전라도 연해 지역! 대동법을 확대해 공납 부담을 개선하고 국가 재정을 정비하려 했습니다. [몰랐던 사실 ⑫ | 서양인 하멜도 효종 시대에 왔다!]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으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미 네덜란드 출신 박연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멜은 훗날 조선에서 탈출해 자신의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효종 시대는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면서도 바깥 세계와 예상치 못한 접촉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이유 | 왜 조선은 상복에 그렇게 민감했을까?]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중요한 원리로 삼았습니다. 상복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누구의 장자인지, 왕위 계승이 정당한지, 왕실의 질서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와 연결됐습니다. 예송논쟁은 복상 예법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논쟁이면서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기도 했습니다. [현생 아이디어 | 사소해 보이는 규칙에도 권력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도 규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권한과 책임이 달라집니다. 효종의 예송논쟁도 겉으로는 상복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왕실의 정통성과 정치질서를 둘러싼 논쟁이었습니다. 역사를 볼 때는 무엇을 두고 싸웠는지만큼 왜 그것이 중요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한능검 핵심 키워드] - 효종: 조선 제17대 왕, 재위 1649~1659년 - 소현세자: 인조의 장남, 효종의 형 - 봉림대군: 효종의 왕자 시절 봉호 - 1636년: 병자호란 - 1645년: 소현세자 사망 - 1649년: 효종 즉위 - 자의대비: 인조의 계비, 효종의 계모 - 북벌론: 효종의 대청 복수·군비 강화 구상 - 김육: 대동법 확대 추진 - 1651년: 충청도 대동법 시행 - 1654·1658년: 나선정벌 - 1659년 기해예송: 서인 1년설·남인 3년설, 1년복 채택 - 1674년 갑인예송: 서인 9개월설·남인 1년설, 1년복 채택 - 송시열·송준길: 서인의 대표 예론 인물 - 허목·윤휴: 남인의 대표 예론 인물 - 현종: 효종의 아들, 두 차례 예송 당시 국왕 - 숙종: 갑인예송 이후 남인 등용 [상식 퀴즈] 1659년 효종의 죽음으로 벌어진 제1차 예송논쟁에서 최종 채택된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은 얼마였을까요? ① 3개월 ② 9개월 ③ 1년 ④ 3년 정답: ③ 1년 [오늘의 한 줄] 효종은 왕이었지만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계모의 상복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충돌했습니다. 왕이 된 아들을 장자로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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